순천의 가을, 개랭이고들빼기마을에서 잠시 멈춤작성일 | 2025-11-18
순천의 가을,
개랭이고들빼기마을에서 잠시 멈춤

11월 초, 전남 순천으로 향했다.
순천 시내를 벗어나 서쪽으로 향하자,
차창 밖으로 황금빛 들판이 펼쳐졌다.
가을걷이가 한창인 논밭 사이로 코스모스가 바람에 일렁이기도 했다.
괜히 반가웠다.
별량면으로 접어드는 교차로 구석에는
'개랭이고들빼기마을'이라는 표지판이 나타났다.
오늘의 목적지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뜻밖의 풍경이 펼쳐졌다.
산자락에 둥지를 튼 마을은 사방이 푸른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특히 눈길을 끈 건 통나무집처럼 생긴 독특한 카라반들이었다.
갈색과 노란색으로 칠해진 원통형 카라반이
산을 배경으로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마치 동화 속 마을 같았다.

마을 사무장님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개랭이는 개울가를 뜻하는 순천 사투리예요.
마을 앞으로 이사천이 흐르거든요. 고들빼기는 이 지역 특산물이고요."
산속 마을의 특별한 하룻밤

마을 안쪽으로 들어서자 다양한 숙박 시설들이 눈에 들어왔다.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은 건 통나무집 모양의 카라반이었다.
원통형 몸체에 아치형 지붕을 얹은 독특한 디자인이 인상적이었다.
"이 카라반들이 우리 마을의 자랑이에요.
밖에서 보면 통나무집 같지만 안은 아주 아늑해요.“

카라반 안으로 들어가 보니 생각보다 넓고 편안했다.
이층침대와 TV, 에어컨까지 갖춰져 있어
가족 단위 여행객들이 머물기에 충분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산 능선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카라반 외에도 글램핑장과 캠핑 데크가 마련되어 있었다.
이사천을 따라 조성된 캠핑장은 아담하면서도 운치가 있었다.
데크 위에 마련된 캠핑 사이트가 적당한 간격을 두고 자리하고 있었다.
마침, 하룻밤 묵어가는 이가 너무 좋았다면서
다음에 꼭 다시 오겠노라는 이야기하며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마을 중심부에는 전통 황토방도 있었다.
”황토방은 우리 마을의 또 다른 자랑이에요.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해요.”
마을 주민의 설명처럼, 황토방은 전통적인 온돌 구조를
그대로 살려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저녁 무렵, 마을은 더욱 고요해졌다.
멀리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와 개울물 소리가
자연의 교향곡을 연주했다.
카라반 창문으로 쏟아지는 별빛과 산 그림자가 어우러진 풍경은
도시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깊은 평화를 선사했다.
흙을 만지고 가을을 수확하다

예약한 시각에 맞춰 고구마 수확 체험이 시작됐다.
밭으로 나가자 이미 몇 가족이 호미를 들고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어린아이들도 작은 바구니를 들고
열심히 흙을 파고 있는 모습이 귀여웠다.
"고구마는 줄기를 따라 캐야 해요.
너무 깊이 파면 고구마에 상처가 나니까 조심하세요.“

마을 어르신의 조언을 듣고 조심스럽게 흙을 걷어냈다.
처음엔 서툴렀지만, 몇 번 시도하니 요령이 생겼다.
호미로 흙을 살살 긁어내자 보랏빛 고구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와, 진짜 크다!“
옆에서 체험하던 아이가 환호성을 질렀다.

두 손으로 겨우 들어 올릴 만한 커다란 고구마를 캐낸
아이의 얼굴에 자랑스러움이 가득했다.
비닐장갑을 낀 작은 손들이 흙 속을 뒤지며
고구마를 찾아내는 모습이 진지했다.

주황색 바구니, 분홍색 바구니에 고구마를 담으며
서로 누가 더 많이 캤는지 자랑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밭을 가득 채웠다.
전통 농기구와 마을 이야기

단체 방문객을 위한 체험관에는
도리깨 같은 전통 농기구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나무로 만든 농기구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는 모습에서
선조들의 지혜가 느껴졌다.
"이건 곡식을 타작할 때 쓰던 도구예요.
요즘 아이들은 처음 보는 물건이죠.“
“이건 키예요. 어릴 때 오줌 싼 아이들에게
이걸 씌워서 소금을 얻어오라고 시키기도 했어요.
지금 아이들도 이걸 머리에 씌워주면 좋아한답니다.”

한쪽에는 옷감을 다듬이질할 수 있는
다듬잇돌과 방망이가 놓여 있기도 했다.
양손에 방망이를 쥐고, 박자에 맞춰서 두드리기 시작하니
청아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묘하게 쾌감이 있는 것이, 흥겹기까지 했다.
역시 흥의 민족인가.
앞마당에는 절구통이 놓여 있기도 해서,
가볍게 옛 농촌을 체험하기에도 즐거웠다.
개랭이고들빼기마을
🏡 위치 : 전남 순천시 별량면 흑가길6
📱 문의전화 : 061-744-4040
👐 체험프로그램 : 고구마 수확 체험 10,000원 / 고들빼기김치 담그기 체험 17,000원 /
배추김치 체험 10,000원 / 도토리묵 만들기 체험 10,000원 / 밥상 체험 15,000원 (전화 문의 후 예약)
🛌 숙박 (1박, 4인 기준) : 글램핑 100,000원 / 캠핑 데크존 이용 40,000원 / 황토방 10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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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안읍성, 조선 시대로 떠나는 시간여행

오후에는 낙안읍성으로 향했다.
개랭이마을에서 차로 20분 거리였다.
동문으로 들어서자,
유구한 역사를 품은 마을을 감싼 성벽이 우리를 맞았다.
문루 아래를 지나는 순간,
마치 조선 시대로 시간여행을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성곽길로 올라가 천천히 한 바퀴를 돌았다.
폭 2미터 남짓한 성벽 위를 걸으며 내려다본 마을은
한 폭의 수묵화 같았다.


초가지붕들이 가지런히 늘어서 있고,
그 사이로 좁은 골목길이 미로처럼 이어졌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건 마을 곳곳에 서 있는 은행나무들이었다.
노랗게 물들기 시작한 잎사귀들이
초가지붕과 어우러져 깊어가는 가을을 알리고 있었다.

성곽에서 내려와 마을 골목길을 거닐었다.
돌담 사이로 난 좁은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장터처럼 조성된 공간이 나타났다.

잔치국수 한 그릇 맛보기로 했다.
투박한 나무 탁자에 앉아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수를 받아들었다.
멸치육수가 진하면서도 깔끔했고,
고명으로 올린 김치와 대파가 입맛을 돋웠다.

국수를 먹고 난 뒤, 관아 건물들을 둘러봤다.
동헌과 내아, 객사가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마루에 앉아 잠시 쉬며 바라본 마당의 풍경이 평화로웠다.
은행잎이 하나둘 떨어지는 모습이
시간이 멈춘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대장간도 눈에 띄었다.
실제로 대장장이가 망치질을 하고 계셨는데,
쇳소리가 울려 퍼질 때마다 불꽃이 튀었다.
달궈진 쇠를 망치로 두드리는 소리,
물에 담글 때 나는 치익 소리,
모루 위에서 형태를 잡아가는 쇳덩이.
이 모든 것이 살아있는 역사 그 자체였다.
낙안읍성민속마을
🏡 위치 : 전남 순천시 낙안면 충민길30
📱 문의전화 : 061-749-8831
🕒 운영시간 : 1, 11, 12월 09:00~17:30 / 2~4월, 10월 09:00~18:00 / 5~9월 08:30~18:30
💲 관람요금 : 어른 4,000원 / 청소년·군인 2,500원 / 어린이 1,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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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암사, 가을 숲이 품은 사찰

다음 날 아침, 선암사로 향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한국의 산사' 중 하나인
이 절은 조계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었다.
주차장에서 사찰까지 이어지는 숲길부터가 특별했다.

계곡을 따라 난 오솔길에 들어서자 공기가 달라졌다.
여름의 푸르름을 간직한 나무들 사이로
가을의 전령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붉게 물들기 시작한 단풍나무,
노랗게 변해가는 은행나무,
그 사이를 수놓은 갈색 낙엽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가을의 정취를 더했다.

15분쯤 걸었을까, 드디어 승선교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지개 모양의 아치형 돌다리는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품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사진을 찍고 있었지만,
다리는 자연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경내로 들어서니 아쉽게도 대웅전이 공사 중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선암사의 매력을 반감시키지는 못했다.
경내를 천천히 한 바퀴 돌며 사찰 특유의 고요함을 만끽했다.
사찰 전각을 하나씩 둘러보며 거닐 때의 평화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특히 흥미로웠던 건 문화재로 지정된 뒷간이었다.
"화장실이 문화재라니!“
처음엔 의아했지만, 실제로 보니 그럴 만했다.
재래식 화장실이지만 자연 친화적인 구조와
독특한 건축 양식이 돋보였다.
옛 선조들의 지혜가 담긴 또 하나의 문화유산이었다.


선암사는 봄철 겹벚꽃 명소로 유명하다고 했다.
하지만 가을의 선암사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오히려 화려함보다는 절제된 아름다움이,
떠들썩함보다는 고요한 사색이 어울리는 곳이었다.
단풍이 완전히 들기 전, 초록과 노랑과 빨강이 공존하는
이 시기가 오히려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선암사
🏡 위치 : 전남 순천시 승주읍 선암사길450
📱 문의전화 : 061-754-5247
🕒 관람시간 : 08:30~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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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차체험관, 숨겨진 오솔길의 끝

선암사 경내를 나와 옆으로 난 작은 길을 따라갔다.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듯한,
비밀스러움이 묻어나는 길이었다.
삼나무 군락과 그 사이로 새어드는 햇살이 오묘하게 아름다웠다.
발걸음을 잠시 멈칫할 수밖에.
정신을 차리고 조금 더 들어서니, 특별한 공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순천 전통야생차체험관이었다.

한옥 양식의 건물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기와지붕과 나무 기둥이 조화를 이룬 전통 건축물이었다.
더 인상적인 건 주변 풍경이었다.
건물 주위로 차나무들이 가지런히 심어져 있었고,
그 너머로는 대나무 숲이 바람에 살랑거렸다.
마치 숨겨진 정원 같은 분위기였다.

체험관 안으로 들어가자
순천 야생차의 역사를 설명해주는 직원을 만났다.
"순천은 예로부터 차나무가 많았던 곳이에요.
대규모 농장이 아닌, 숲이나 산속 거친 환경에서 자란 것이 많았죠.
우리는 이걸 야생차라고 부릅니다.
특히 조계산 일대의 야생차는 품질이 우수하기로 유명했어요.”
전시관 한쪽에는 차의 종류와 효능, 제조 과정 등이
상세히 설명되어 있었다.

본격적인 다례 체험이 시작됐다.
해설사 선생님의 설명에 따라 따뜻한 물로 다구를 데우고,
순천 야생 찻잎을 다관에 넣었다.
"첫 번째 우린 물은 찻잎을 깨우는 물이에요.“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며 차를 우렸다.
두 번째 우린 차를 작은 찻잔에 따라 마시니,
은은한 향과 함께 부드러운 맛이 입안에 퍼졌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바라보며
차를 마시는 시간은 그 자체로 명상이었다.
한옥의 처마 끝과 차나무가 어우러진 모습,
멀리 보이는 산 능선,
고요한 정적 속에서 들려오는 새소리.
이 모든 것이 차 한 잔과 함께 마음속에 스며들었다.

"차를 마시는 것은 자연과 대화하는 시간이에요.
급하게 마시지 말고 천천히 음미하세요.“
선생님의 말씀처럼,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같은 찻잎으로 세 번, 네 번 우려내며 변화하는 맛을 느꼈다.
처음엔 연했다가 점차 진해지고,
다시 은은해지는 과정이 삶의 이치를 닮은 듯했다.
순천 전통야생차체험관
🏡 위치 : 전남 순천시 승주읍 선암사길450-1
🕒 운영시간 : 09:30~17:30 (12:00~13:00 점심시간 / 티켓 마감 17:00)
👐 체험프로그램 : 다례체험 1인 3,000원 / 다식체험 1인 5,000원 (2인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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